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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작가의 저택이라 할지라도 정전에 대비한 수단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한여름 밤의 열기를 식혀주던 에어컨이 멈춘 지 10여 분도 지나지 않아 후덥지근한 공기가 몸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상윤은 비상전원 설비가 되어있는 이웃집을 내다봤다. 여느 곳과 다름없이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며칠 전부터 집이 비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린 상윤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호주에서 열리는 학회에 초청받은 건 피서나 마찬가지라며 아이처럼 좋아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8월에 만끽하는 겨울이라. 한평생을 북반구에서 지냈다는 것에 딱히 불만은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남반구에 있을 브라운 박사가 부러웠다. 빈말이 아니었다. 상윤은 여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추울 때는 옷을 껴입으면 된다 해도, 덥다고 피부 거죽을 뜯어낼 수는 없는 일이다. 이미 상반신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쳐져 있지 않았다. 입고 있던 반바지도 마저 벗어 던질까 고민했다. 아니, 아니지. 상윤은 고개를 내저었다. 더위는 주의를 흐트러지게 만든다. 바로 지금처럼. 등줄기를 타고 땀이 주룩 흘러내렸다. 그 감각이 소름 끼치게 불쾌해서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언제 전기가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해결책은 창문을 여는 것밖에 없었다. 바람이 불어 조금이라도 시원해지길 기도했지만, 습기를 가득 머금은 축축한 것이라 소용없었다. 휴식을 원하는 뇌와, 100%에 한없이 가까운 습도와, 30도를 넘나드는 기온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은 유능한 FBI 수사관이라 해도 견디기 힘들었다. 차라리 밖으로 나가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대도시에 일어난 정전이니 조금 걷다 보면 복구될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전기가 끊긴 지 30분도 넘었다는 사실은 애써 무시했다. 몸이 뜨겁다 못해 뇌까지 녹아내리는 것 같았으니까.
……열쇠를 어디 놔뒀더라. 과거의 자신을 탓할 기운도 없었다. 잠깐인데 문단속은 넘어가도 괜찮지 않을까,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나사 빠진 생각마저 들었다. 상윤은 지친 기색이 완연한 채로 캄캄한 실내를 훑었다. 탁자 위에 있는 작은 상자에 눈길이 갔다. 연인이 억지로 쥐여준 것이다. 그냥 받으면 될 걸 가지고 왜 실랑이를 벌이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었나. 단호한 태도에 어쩔 수 없이 가져오긴 했지만, 포장도 뜯지 않은 채로 던져둔 것이 며칠 전이었다.
상윤은 선물을 그리 반기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주는 마음에는 당연히 고마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들이 유품으로 변하는 일을 겪고 나서는, 선물을 받는 것 자체가 꺼려졌다. 이제는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남기고 간 흔적은 슬픔을 안겨줄 뿐이었다. 과거에 비슷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동료는 답지 않게 감상적이라며 어깨를 툭 치고 자리를 떴다. 그것이 마지막 대화였다.
텁텁한 공기를 계속 들이켜서인지, 목이 메었다. 습관적으로 담배를 물고 성냥을 손에 쥐었다. 습기를 가득 머금어서 불이 잘 붙지 않았다. 몇 개비를 버리고 나서야 칙, 하고 불꽃이 일렁였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따라오는 것은 당연지사, 상자의 그림자가 길게 뻗어 나갔다. 그 모습이 마치 죽음이 드리우는 것 같아서, 더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상자를 집어들어 밋밋한 포장지를 뜯어내자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마찬가지로 밋밋한 카드였다.
더위에 약한 거 아니까 받아둬요.
제멋대로 휘갈겨 쓴 문장이었지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퉁명스러운 말투 이면에 숨길 수 없는 다정함이 묻어나왔다. 상윤은 불현듯이 깨달았다. 이래서야, 과거의 편린에 사로잡혀 망설이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연인으로서 실격이군. 상자에 든 것은 손바닥만한 선풍기였다. 옆에 달린 휠을 돌리자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불었다. 후덥지근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어쩐지 숨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