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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윤 아저씨는 바람 같아요."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이 말을 꺼낸 이를 신뢰하고 있었기에 상윤은 귀를 기울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니, 꼬마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기준이 형 주위를 하염없이 맴도는 모습이 바람처럼 느껴져서요."
곤란하게 되었군. 상윤은 자조했다. 코난이 눈치챘다면 다른 사람이 알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였으니까.
"제 생각이지만요, 기준이 형이랑 진지하게 얘기해보는 게 어떨까요?"
"그가 내 말을 얌전히 들어줄 것 같지는 않은데."
"그것도 그렇지만요……. 아무튼, 상윤 아저씨, 이렇게 있다가 기준이 형이 바람처럼 사라질지 누가 알겠어요."
"그래서, 네가 말하고 싶은 결론이 뭐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작은 책략가가 자신 없는 표정을 짓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상윤은 어떤 말을 꺼낼지 잠시 고민했다.
"결론이 나오지 않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어떻게든 매듭을 지을 테니."
땅을 파고들기라도 할 듯 숙여진 머리통에 손을 얹었다. 부드럽게 감겨오는 머리카락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상윤 나름의 위로였다.
*
"기준 씨, 벌써 마감할 때가 됐네요."
냉장고에 남은 재료들을 정리하던 준영은 연주의 말에 시계를 확인했다.
"아, 그러네요. 연주 씨는 먼저 가세요."
"정말요?"
"네. 오늘 혼자서 오픈 준비하셨잖아요."
"고마워요, 안 그래도 저녁 약속이 있었는데. 그럼 내일 봐요!"
"조심해서 가세요."
연주가 나가고 나서 준영은 뒷정리에 몰두했다. 테이블 위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의자를 가지런히 집어넣고, 식기를 설거지하는 것과 같은 자질구레한 일들은 늘어지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시간을 잡아먹게 된다. 어떤 일이든 한번 시작한 이상, 낭비하는 시간 없이 빨리 끝을 내는 게 성미에 맞았다. 마지막 접시를 건조대에 올려놓고 기지개를 켜는 순간,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데도 서늘한 바람이 몸을 스쳐 지나갔다. 문이 제대로 안 닫혔나? 별생각 없이 고개를 든 것을 후회했다. 머리카락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윤? 당신이 왜……."
여기서 마주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준영은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지 않아서 다행이군."
"엉뚱한 대답을 하는 건 여전하네요. 그래서, 저를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그걸 모르겠어."
당신이 모르면 누가 안다는 거야 FBI! 느닷없이 찾아와서 속을 뒤집어놓는 탓에 험하게 나가려는 말을 꾹 삼켰다. 이런 식으로 불쑥 나타나면, 내가 당신을 일부러 찾지 않는 의미가 없잖아. 당황했던 것도 잠시, 가슴에 무거운 돌이라도 얹은 것처럼 답답해졌다. 준영과 그의 관계는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처럼 어느 순간부터 협력하기는 했어도, 이제까지의 악연을 떨쳐내기는 힘들었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그랬다. 증오인지, 사랑인지, 뒤섞여서 혼탁해진 감정을 갈무리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런 상황에서 모습을 드러낸 상윤이 달가울 리 없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만 나가주시죠, 라고 말하려던 찰나 선명한 녹빛 눈동자에 시선을 뺏겼다.
"안기준 군. 아니, 강준영 군."
"……지금 그 이름을 부르는 의도를 모르겠네요."
"낮에 꼬마가 이런 말을 했어. 내가 자네의 곁을 맴도는 바람 같다고 말이야."
"잠깐만요. 잘 못 들었는데, 뭐라고 했죠?"
"내가, 자네의 주위를, 하염없이 맴돌고 있다고."
그 말, 내가 좋을 대로 해석해도 되는 말인가? 준영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곧이곧대로인지, 숨겨진 뜻이 있는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눈앞이 어질어질해졌다.
"……그래서요?"
"준영 군도 그렇게 생각하나?"
"물음에 물음으로 답하는 거 악취미인 거 알고는 있죠?"
"그러는 자네도 물음으로 답하고 있는데."
"아, 진짜! 이상윤!"
"그래."
기대하지 말라고 몇 번을 되뇌면서 준영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를 좋아해요?"
"아니."
그러니까, 뭘 기대한 거야. 애써 태연한 척 웃음을 지어냈다.
"그럴 줄 알았……."
"좋아한다는 말보다, 사랑한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 같군."
상윤의 말이 한 줄기의 바람이 되어 귓가를 간지럽혔다. 준영은 그 달콤한 바람에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