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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아카]28주 후

Rye_in_your_eye 2017. 1. 9. 05:11

초침과 시침이 완전히 맞물렸다. 오늘도, 살아남았다. 후루야는 나무로 된 책상에 오늘 치의 흔적을 새겼다. 눈은 이미 어둠에 적응한 지 오래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할까.

 

"레이 군, 이제 눈 좀 붙여."

 

소리 없이 다가 온 아카이가 속삭였다. 자신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아카이였다. 이상 사태에 관한 보고가 들어오는 것과 거의 동시에 아카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었다. 근무 중에는 연락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라 어지간히 급했나보다 싶어 전화를 받자마자 당장 거기서 빠져나오라고 소리 지르는 아카이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허튼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최소한의 소지품만 챙기고 문을 연 순간,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사방에 흩뿌려져 있는 핏자국, 코를 찌르는 역겨운 냄새. 그리고, 저 멀리서 달려오는 인간의 형상을 한 어떤 것. 후루야는 급하게 문을 닫고 책상을 밀어 바리케이드를 쳤다. 꿈이 아니었다. 자신이 알던 얼굴을 하고 달려오던 기괴한 것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간 문이 곧 부서질 것이다. 문틀이 통째로 흔들리고 있었다


후루야는 침착하게 빠져나갈 방법을 떠올렸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뭐지? 권총, 소음기, 탄창 3. 여기가 본청이라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폐쇄된 통로를 이용하면 들키지 않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복도로 나가야 하긴 하지만, 그 방법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눈짐작으로 파악했던 그림자는 하나뿐이었다. 심호흡을 하고 문 옆에 기대었다. 


문이 완전히 박살나고 후루야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불청객의 머리를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피와, 허여멀건한 액체와, 머리의 일부였던 조각들이 후두둑 쏟아졌다. 목 아래의 신체는 그대로 남아 바르작거렸지만 곧 움직임을 멈췄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루야는 숨겨진 통로에 뛰어 들어갔다. 강철로 만들어진 출입구였으니 뒤는 걱정이 없었다. 어두운 길을 따라 반대편까지 걸었다. 그렇게 긴 통로가 아니었기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밖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를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노트북을 두고 와서 불가능했다. 경첩에 제대로 기름칠이 되어있기를 빌며 후루야는 문고리를 돌렸다. 부드럽게 열리는 문틈으로 빛이 쏟아졌다. 한 번 문을 연 이상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재빨리 빠져 나와 주차장으로 달렸다. 한 층 한 층 내려갈 때 마다 뒤에 따라붙는 것이 많아졌다. 한 두 번은 그대로 머리가 터졌지만, 역시 달리는 중에 쏘는 것은 명중률이 떨어졌다. 앞을 가로막는 것만 조준하며 달린 후루야는 자신의 차까지 거리를 가늠했다. 하필 건물에서 먼 곳에 주차되어 있었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참은 채 질주했다. 차 문은 잠겨있었다. 당연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잠그고 올라갔으니까. 문제는 주머니를 더듬어도 차 키를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젠장, 어디다 흘린 거지? 후루야는 절망에 빠졌다. 뒤를 돌아보니 그것들과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그 때, 굉음과 함께 등장한 차의 헤드라이트가 자신을 비췄다.

 

"어서 타!"

"아카이?"

 

후루야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차에 올라타고 문을 잠갔다.

 

"꽉 잡아."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액셀을 거칠게 밟았다. 몸이 앞으로 튀어나갈 정도로 쏠렸다. 어떻게 된 건지 묻고 싶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여기를 빠져나가는 것이었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도로는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 차체가 심하게 덜컹거리는 원인을 찾던 후루야는 결론에 도달하는 순간 생각을 그만두었다. 차로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인적이 드문 교외였다. 공사 중인 건물 외에는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여기가 어디죠?"

"기밀이지만, FBI의 세이프 하우스 중 하나야. 비상사태를 대비해서 자체 발전시설까지 만들어 놓은 곳이지."

 

, FBI가 언제 일본에 이런 것을 만들었단 말인가. 나중에 정식으로 항의 절차를 밟을 것이다. 나중에, 말이다. 못마땅한 후루야의 얼굴을 본 건지 아닌 건지 아카이는 건물 뒤편으로 차를 끌고 들어갔다. 처음 봤을 때는 위태로운 건물처럼 보였는데 뒷면은 제법 깔끔하게 축조되어 있었다. 아카이가 차고의 문을 닫고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후루야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최소한의 가구만 놓여 있는 것과 반대로 온갖 총기류가 구비된 진열장을 보고 어이가 없어졌다. 이것도 포함이다.

 

"일단 앉게. 지금부터 자세하게 설명할 테니까."

 

그런 후루야의 속마음을 읽은 듯 아카이가 말을 걸어왔다. 속으로 뜨끔했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그러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는 방금까지 봤던 것이 아니었다면 절대 믿지 못할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어떤 제약 회사의 연구소에서 바이러스 실험 도중 사고가 발생했고, 감염 개체는 폭력적인 성향만 극도로 커지게 되었다. 연구소가 도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풀려난 실험체의 통제가 불가능해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바이러스는 도시 전체로 확산되었다. 전 세계 정보기관의 이목이 이 사태에 집중되었다. FBI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건을 통칭 분노 바이러스라고 명명하고 일본에 파견된 수사관들의 즉시 귀환을 지시했다, 라는 것까지 들은 후루야는 의문점이 생겼다.

 

"그런데 왜 나를 찾아왔어요."

"자네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거든."

"...그래서 지금부터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본부에 연락을 했으니 헬기가 올 거야. 그걸 타면 공항으로 갈 수 있어."

"...."

"...지금은, 나를 따라와주지 않겠나."

 

후루야는 차마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마음속에 거센 파문이 일었다. 생각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카이도 더 이상은 말이 없었다. 꽤 시간이 흘렀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시계를 확인한 아카이는 커튼을 쳤다. 후루야도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쪽의 커튼을 내렸다.

 

"감염자들은 시각과 청각을 제외하고 어떤 감각도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보여."

"통각도, 말이죠."

 

아까 빗맞은 총알에 팔이 꿰뚫리고도 속도를 늦추지 않던 감염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눈인사를 건네던 얼굴을, 내 손으로.... 검은 조직에서 겪었던 일과는 궤를 달리하는 끔찍함에 속에서 무언가 올라올 것 같았다. 곧장 화장실에 달려가 속을 쥐어짜냈다. 한참을 토해냈더니 앉아있을 힘마저 다 써버린 것 같았다. 후루야는 그대로 바닥에 몸을 맡겼다.

 

*

 

그 이후로 오지 않는 헬기를 기다리며 세이프 하우스에 틀어박힌 지 일주일이 넘었다. 방금 책상에 새긴 8번째의 빗금을 손으로 쓸었다. 몇 개의 빗금을 더 새기게 될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 때, 아카이가 손을 잡아왔다. 굳은 살로 뒤덮인 거친 손이지만 따뜻했다. 이 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손, 절대 놓지 말아요."

"놓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누가 걱정한대요?"

 

후루야는 부러 말대꾸를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이 점점 커질 것 같았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아카이의 손을 잡고 있는데 왜 이렇게 진정되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잠깐만, 레이 군. 이 소리...."

 

설마 이 소리가 들리는 건가 싶어 숨을 참았다. 이런 감정을 들키기는 싫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데 무슨 말이냐며 능청스레 되물었다. 아카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히 들렸는데. 착각일 거라고 말하려는 순간 후루야의 귀에도 뭔가 들리기 시작했다. 들어본 적 있는 소리였다.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일주일이 넘게 기다리고 있던 그 소리. 두 사람은 급하게 옥상으로 올라갔다. 한 대의 헬리콥터가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흰 색으로 쓰인 FBI라는 글자를 확인한 순간 안도감이 밀려왔다.

 

후루야는 옥상의 문을 닫고 아카이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언제 꺼냈는지 라이플을 조립하고 있었다. 그렇지. 헬리콥터가 가까워질수록 청각에 예민한 감염자들이 몰려올 가능성이 높았다. 후루야도 권총의 탄창을 바꿔 끼었다. 남은 것은 기다리는 것뿐이다. 초조함과 기대감으로 마음이 얼룩지는 가운데 아카이가 입을 열었다.

 

"접근 가능한 위치에 오면 먼저 올라가도록 해. 엄밀히 말해서 나는 FBI 소속이지만 레이 군은 아니지. 내가 남아있다면 어떻게든 손을 쓰겠지만 자네가 남아있는 상황이면 구조를 그만 둘 가능성도 있어."

 

분하지만 그 말이 맞았다. 후루야는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바람이 세게 부는 탓인지 좀처럼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내려다본 곳에는 점점 감염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오면 될 것 같은데. 사다리가 내려와 있는데도 손이 닿지 않는 상황이 답답했다. 바람이 멈춘 사이 드디어 헬리콥터가 다가왔다. 사다리를 꽉 붙잡고 아카이를 불렀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기체가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옥상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후루야는 필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카이가 그 손을 붙잡았다. 간신히 잡은 손이 자꾸만 미끄러지려고 했다.

 

"꽉 잡아!"

 

어떻게든 끌어올려야 해. 후루야는 안간힘을 썼다. 아카이의 발이 사다리에 걸쳐지려는 찰나 문이 부서지면서 감염자들이 뛰쳐나왔다. 그들은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뺏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끝을 직감한 아카이가 후루야의 손을 놓았다. 어둠속에서도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빛을 잃지 않았다. 그것이 후루야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

 

감염자들의 신체도 영양소를 섭취하지 않으면 죽어버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카이를 남겨두고 온 지 28주 후, 후루야는 14시간의 비행 끝에 도쿄에 도착했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었다. FBI의 인도에 따라 미국에 도착한 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런 감정도 표현하지 않았다. 이를 보다 못한 조디 스털링이 챙겨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그녀는 반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자신을 거둬 주고, 꾸준하게 말을 건넸다. 오늘은 날이 좋아. 잠시 밖에 나가 보는 건 어때? 아 참, 도쿄 말이야, 복구 작업이 시작됐대. 돌아갈 생각은 없어? 후루야가 돌아올 결심을 한 것은 그 말 덕분이었다. 아무리 괴롭더라도 과거와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를 가냐고 묻는 조디에게 적당히 둘러대고 빠져나왔다. 도심을 기점으로 작업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안전 구역을 벗어나는 게이트는 닫혀 있었다. 총을 들고 그 앞을 지키는 경비원도 있었다. 후루야에게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공안에 복귀하겠다는 연락을 하자 바로 최고 등급의 보안카드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카드를 받아 든 경비원이 스캔을 시작했다. 초록색 빛이 나왔다. 허가의 뜻이었다. 굳게 닫힌 문이 열리자 후루야는 안전 구역을 뒤로 했다. 예전의 그였다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었다.  도로 위에는 미처 복구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답게 여기저기에 형체가 문드러진 것들이 널려 있었다. 이미 오래 전에 썩어버린 것 같았다.  내일은 이 구역 담당자와 만나봐야겠군. 후루야는 끔찍한 광경을 보고서도 사무적인 자신의 태도가 우스웠다. 하긴, 동료를 제 손으로 쏘기까지 했는데 이런 데에 타격을 입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한참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 때 겉모습이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면 지금은 그야말로 폐허에 가까웠다. 후루야는 심호흡을 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꿈속에 나왔던 곳이다. 바로 앞까지 왔지만 좀처럼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한참을 서성이다가 문을 열었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동안 지난날의 기억이 덧씌워졌다. 어둠 속에서도 느낄 수 있었던 그의 체온. 후루야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잠깐. 이 소리는 뭐지? 소름이 돋았다. 이 집에 움직이는 것은 아무도 없을 텐데, 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권총을 들어올렸다. 감염자가 아직까지 죽지 않았다면 도쿄 전체가 위험한 상황이었다.

 

.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풀렸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환영인가? 온 몸에 흉터가 새겨진 아카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 ..., 맞아?"

 

틀림없는 아카이 슈이치였다. 묻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많은데, 아카이는 그 말만을 내뱉고 쓰러졌다. 후루야는 떨리는 손으로 조디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었다. 조디가 데리고 올 수 있는 모든 FBI 수사관을 동원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분위기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방제복으로 무장한 그들은 아카이와 후루야를 격리시켰다

후루야는 미칠 지경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과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카이는 감염자가 아니었다. 감염자들은 폭력적인 행동만을 보이는데, 그는 아니었다. 분명히 말을 걸어왔다. 그와 만나야 하는 이유를 피력해도 검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이제 통행 제한 시간입니다. 내일 다시 찾아오시죠."

 

몇 시간을 기다린 사람을 앞에 두고 하는 일방적인 통보였다. 분노한 후루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것도 모를 정도로 몸이 떨려왔다. 멱살을 잡고 바닥에 내팽개치고 싶었지만 소란을 피웠다가는 아예 접근이 금지될 지도 몰랐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

 

조디는 FBI의 대표 자격으로 남아 검사 과정을 지켜보았다. 매직미러 너머로 보이는 장면은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무자비했다. 의식을 되찾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의 사지를 구속하고 온갖 살균제를 도포하는 것도 모자라, 살갗이 벗겨지도록 닦아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몸부림치며 반항하던 아카이는 이내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했다. 의료진은 그런 아카이를 폭이 좁은 수술대에 던지다시피 올려놓고선 몇 번이고 피를 뽑아냈다. 그렇지 않아도 창백한 안색이 이제는 시체의 낯빛마냥 질려있었다.

 

"이건 너무 심하잖습니까!"

"매뉴얼에 나와 있는 대로 할 뿐입니다. 방해가 되니 비키세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고서는 돌아서는 뒤통수에 총알을 예쁘게 박아 넣고 싶었다. 매뉴얼 좋아하시네, 싸이코패스같은 자식들. 자신도 매뉴얼을 숙지하고 있었다. 어디에도 저렇게 인간을 더러운 병균 취급하라는 말은 없었다. 생존자를 발견하면 격리하라고 나와 있을 뿐인데! 속으로 분을 삼켰다. 아카이가 간헐적으로 흘리는 신음소리를 제외하면 기계음밖에 흐르지 않았다. 한참을 더 기다리고 나서야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과정보다 더 충격적인 결과였다.

 

"아카이 슈이치는 감염자가 아닙니다."

"그렇겠죠. 증언에 의하면 감염자일 리가 없어요."

"하지만 비감염자인 것도 아닙니다."

"뭐라고요?"

"그는, 그래요. 쉽게 말하면 보균자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나마 친절한 의료진이 설명을 이어갔다.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경로는 감염자와의 신체적인 접촉이에요. 아카이 씨의 몸에 남은 흉터는 감염자들이 공격한 흔적이 틀림없는데, 보통의 감염자들처럼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지도 않고 의사소통이 가능한 상태라는 게 특이점이죠. 검사를 통해서 아카이 씨의 혈액에는 바이러스가 남아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잠깐만요. 그럼 슈가 다른 사람과 접촉하면 그 사람이 감염될 수도 있는 건가요?"

", 그럴 가능성이 높아..."

"그렇기 때문에 아카이 씨의 면역체계를 분석하기 전까지는 신병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아까 그 인간이었다. 갑자기 끼어들어선 하는 말이 가관이다.

 

"그건 동의할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 정식으로 요청하기 전까지는 데려갈 수 없을 겁니다."

", 당장 내일이라도 데려갈 테니 준비나 해놓으시죠!"

 

조디는 감정을 한껏 담아 쏘아붙이고 제한 구역을 빠져나왔다. 마음이 복잡했다. 가슴은 후루야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머리는 그건 안 된다고 자신을 통제했다. 일단 제임스에게 연락을 해야겠어. 조디는 아무도 통화를 들을 수 없게 방으로 돌아가 문을 걸어 잠갔다.

 

*

 

모든 시설의 불이 꺼진 시각, 조용히 움직이는 인영이 있었다. 보안 시스템이 몇 번 그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소용없었다.  침입자는 가장 깊숙한 제한 구역까지 도달했다. 이로써 제한 구역에 있는 사람은 두 명이 되었다.

 

"저 왔어요."

 

온 몸이 결박당한 남자가 몸을 뒤틀었다. 구속구가 움직이면서 철컹이는 소리가 났다.

 

"괜찮아요. 가만히 있어도."

 

후루야는 그의 연인 곁으로 걸어갔다.

 

"당신의 눈동자가, 하루도 빠짐없이 꿈에 나타났어요. 꿈에서라도 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해야 할까요, 꿈에서밖에 볼 수 없어서 미칠 것 같았다고 해야 할까요."

 

아카이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개었다. 뼈마디의 윤곽이 보일 정도로 앙상한 손가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

"..."

"왜 손을 놨어요. 놓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 ...미안.....“

아니. 그런 말을 들으려고 찾아온 건 아니에요.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요.”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하는 목소리가 애처로웠다. 후루야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서 떨어진 눈물이 아카이의 뺨에도 흘러내렸다.

 

"뭐야, 울지 마요.“

 

울지 말라고 하는 이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사랑해요."

 

후루야는 다시 찾은 연인에게 입을 맞추었다. 메마른 입술을 가르고, 혀를 감싸올렸다. 황홀한 키스였다.

 

"...!"

 

갑자기 후루야가 숨을 들이켰다. 양 팔로 몸을 끌어안더니 무릎을 꿇었다. 아카이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후루야의 몸이 발작하듯이 뒤틀리고 온 몸에 핏줄이 돋아났다. 안 돼. 다시 일어난 그의 눈동자는 빛이 바래있었다. 


*


후루야였던 것은 분노에 휩싸였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정해졌다. 그것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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