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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아카]야경

Rye_in_your_eye 2016. 10. 24. 00:45

"슈이치, 저 오늘 늦어요."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5시, 후루야 레이는 출근과 동시에 늦은 귀가를 예고했다. 공안업무의 특성 상 근무시간은 불규칙적인데다, 늘어났으면 늘어났지 절대 줄어들지는 않았다. 


"그래. 잘 다녀와."


아카이는 여상한 어조로 대답했지만 그 말을 듣는 후루야는 미안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로 일 주일 연속 야근이었다. 한편으로는 억울하기도 했다. 조직의 괴멸 이후 멋지게 프로포즈를 성공해서,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아카이와 함께하는 꿈같은 나날을 기대했는데. 연인과 보내는 시간보다 본청에 머무르는 시간이 훨씬 많은 현실에 분노하며 후루야는 문고리를 돌렸다. 부드럽게 닫히는 문 틈으로 아카이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오늘도, 인건가..."


*


후루야의 책상은 원래부터 흰 색이었다는 듯이 종이로 뒤덮여있었다. 본청으로 복귀할 때는 어딘가 벅차오르기까지 했는데, 그런 감회도 잠시, 끊임없이 밀려오는 서류의 파도에 빠져 죽을 것만 같았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허우적거리고 있는 동안 하나 둘 씩 자리를 뜨더니 어느새 불이 켜진 곳은 후루야의 자리밖에 없었다. 


하얀 건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라. 붉은 것은 아카이 슈이치.....


짝. 후루야는 자신의 양 뺨을 올려붙였다. 정신차리자 후루야 레이. 이미 늦었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퇴청하려면 이 빌어먹을 종이쪼가리들을 처리해야 했다. 


"본 안건은 총포ㆍ도검ㆍ화약류 등의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제 14조 3항에 의거하여 국내에 입국하는 국빈, 장관급 이상의 관료 및 이에 준하는..."


틀렸다. 아무리 읽어도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다. 후루야는 그대로 책상 위에 엎어졌다. 조금만 쉬자. 그러면 서류를 없앨 수 있고, 서류를 없애면 집에 갈 수 있고, 집에 가면 슈이치를 볼 수 있고... 아니야. 지금 당장 보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 후루야는 앓는 소리를 내더니 핸드폰의 잠금을 풀었다. 배경화면으로 해 놓길 잘했어. 액정을 가득 채운 연인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잘생겼네."


100명에게 물어보면 100명 모두가 잘생겼다고 대답하겠지?


"멋있어."


700야드가 넘는 거리에서 목표물을 명중시키고, 대인 전투까지 수준급인 FBI 요원이라니, 이렇게 멋질 필요는 없잖아. 


"...보고 싶다."

"나만 그런게 아니어서 다행이군."


이제는 환청까지 들리는건가. 


"정말 보고싶어요, 슈이치..."


후루야는 눈을 감았다. 곁에 있어도 그리운 사람인데 이렇게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게 미안했다. 


"자네가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후루야는 벌떡 일어났다. 이 층에 남아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텐데 누구지? 아니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니 너무 해이해졌어! 급하게 전투자세를 취하며 뒤돌아본 곳에는 그리워하던 이가 있었다. 후루야는 눈 앞에 있는 사람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꼭 껴안았다. 자신이 달려들어도 흔들림 없이 받아주는 단단한 품이, 일정한 박자로 등을 토닥여주는 손이, 틀림없는 아카이 슈이치였다.


"그런데 슈이치."

"응."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요?"


입을 다물더니 곧 어깨를 으쓱거린다. 


"그게 중요한가."

"뭐,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 중요한 것은 아카이 슈이치가 곁에 있다는 점이다. 후루야는 활짝 웃었다.


"많이 지친 것 같은데, 잠깐 산책이라도 하는게 어떻겠어."

"슈이치와 함께라면 뭐든 좋은걸요."


아카이는 오늘따라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후루야 덕분에 귀 끝에서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도 가만히 듣고만 있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이쪽도 마찬가지야, 후루야 레이 군."


이번에는 후루야의 귀가 발그레해졌다. 나란하게 귀를 물들인 두 사람은 목적지를 정하기 시작했다. 입구에 경비원이 있었죠? 두 명. 들키면 귀찮아지는데. 그럼 위쪽은 어떤가. 옥상이라, 그것도 좋네요. 어두컴컴한 계단을 오르고 올라 도착한 본청의 옥상은 최신식 보안 시스템으로 굳게 잠겨 있었다. 이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아카이를 보고 후루야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말을 하긴 부끄럽지만, 제가 공안이 자랑하는 에이스거든요."


후루야의 목에 걸려있던 카드를 대자 바로 보안장치가 해제되었다. 아카이는 들뜬 분위기의 연인을 눈에 담았다. 사랑스러운 얼굴으로 몇 발자국 성큼 내딛는가 싶더니 금세 되돌아와서는 자신의 손을 잡았다. 새벽 공기가 기분 좋게 얼굴에 스쳤다. 저 멀리 보이는 거리에는 어둠이 내려앉아 가로등만이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걷기 시작한지 몇 분 쯤 되었을까, 후루야가 멈춰섰다. 


"슈이치."

"듣고 있어."

"매일같이 보던 야경인데, 오늘따라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네요."


아니. 정말로 아름다운 것은 따로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자신을 비추고 있는 푸른 빛. 아카이는 조심스레 밤하늘에 입을 맞췄다.